'박대위의 말년 3년차'란 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왜 퍼왔냐구요,,,,,,
여그 나오는 주인공이 제가 아는 분이기 때문이지요,,,ㅎ
어케 아냐고???
김세령 중사는 저의 0000 000(?)이랍니다.
궁금하면 멜 주세요,,ㅋㅋ
우연찮게 저의 패밀리인 젬마와 성과 이름이 같습니다,,,,ㅎ
Q. 직책과 임무는?
A. 직책은 공수교육처 착지교관이다.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는 상황의 여러 단계 중 착지에 관하여 다치치 않고 안전하게 지상에 내려오는 방법을 교육한다.
Q. 군과 인연을 맺은 계기는?
A. 어릴 때부터 군인 또는 경찰이 되는 것을 꿈으로 하고 있었다. 고향이 경상남도 밀양인데, 고3 시절 집안 사정이 어려워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군인의 길을 선택하였다. 결국 어린 시절의 꿈을 실현한 셈이다. 1999년 9월 27일 국방부 여군학교에 입대하여, 2000년 2월 14일 여군부사관 160기로 임관하였다.
Q. 여러 직책 중 특전사를 선택한 이유는.
A. 아무것도 모르던 인문계 고3 시절, 무작정 서류를 들고 병무청을 찾아갔는데 처음 만난 사람이 바로 검은 베레모를 쓰신 분이었고, ‘우리들도 여군을 모집하고 있다’고 하여 결국 특전사를 선택하게 되었다(웃음). 결국 베레모가 가장 먼저 닿은 군대와의 인연인 셈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특전사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여군학교에 입대하였는데, 특전사 후보생이라고 하니 다른 특기의 여군 후보생들이 우러러보는 시선으로 바라봐서 일찍이 자부심을 느꼈다. 훈련을 마치고 임관했을 때에도 아직 19세의 미성년자였다.
Q. 기본과정인 국방부 여군학교 교육을 마치고 정말 특전사가 되기 위한 공수훈련을 받을 때는 어떠했나.
A. 다섯 명의 동기와 함께 처음 공수훈련을 받기 시작하였을 때에는 ‘뭐 이런 훈련이 있나’라는 생각을 하였을 정도로 정말 힘들었고, 많이 울었다. 여군학교에서는 유격훈련에서도 1등을 차지할 만큼 성적도 좋았고 자신감도 있었는데, 공수훈련에서는 남군들과 동일한 환경에서 함께 달리며 체력의 한계를 느꼈고, 자신감이 없어지며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만두고 싶다거나, 다음 기회를 노려 볼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훈련 중 발목이 골절되는 부상을 입기도 했지만, 그때에도 포기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Q. 군 생활에 회의를 느낀 적은 없나.
A. 전혀 없다. 특전사의 상징인 흑복을 입고 근무한다는 데에 늘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나의 길에 후회를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Q. 실제 작전에 투입되어 근무한 적이 있나.
A. 임관한 뒤 실제의 전쟁 상황이 발발한 적은 없기 때문에 전장을 뛴 경험은 없지만, 대통령 경호, 인천국제공항 개항 전 안전 점검, 2002년 월드컵 당시 경기장 안전 점검 등의 임무를 수행한 적은 있다. 교관 생활을 하기 전 대테러 부대에서 근무하였을 때에는 역레펠 시범 교관으로서 대통령, 국방부장관 등 앞에서 특공무술 시범을 보이기도 하였다.
Q. 착지교관에 선발되었을 때의 소감은.
A.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데에 책임감을 느꼈고, 보다 신중하고 자기관리에 철저하여야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Q. 혹시 별명을 가지고 있나.
A. 공교처 마녀, 공교처 전지현으로 불린다(웃음). 마녀라는 호칭은 공수교육처 교관 생활을 거의 시작하자마자 듣게 되었는데, 위험에서 대원들을 지키기 위해 큰소리를 치고 악랄하게 교육을 시켜서 그런 것 같다. 목소리를 높이면 교육생들이 훨씬 긴장을 하는데, 그들도 자신들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내 마음을 알고 붙여 준 별명이다. 수료하고 나가며 ‘잘 지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를 해 올 때에는 가슴이 뿌듯하다.
Q. 처음 교관 생활을 시작할 때와 다른 점은.
A. 여유이다. 처음에는 교관인 나 역시 힘들었고, 무조건 나의 기준으로 교육생들을 닦달하였지만 지금은 어떻게 해야 대원들을 잘 이끌어 나갈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늘 교육생의 눈높이에 맞추어 주문하고 지도하려고 노력한다.
Q. 여군 교관이어서 힘든 점이 있지는 않나.
A. 남군들이 나를 우습게 보지 않도록 두 배 더 뛰고, 더 노력하고, 더 멀리 가고, 더 강하게 이끌어나갔다. 나의 결론은 결국 체력도 정신력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평소 100m를 20초에 뛰어도 교육생과 함께라면 15초 만에 뛸 수 있다. 아무리 몸이 아파도 군복만 입으면 아픈 것을 느끼지 못했다. 지금까지 군 생활을 해 온 10년동안 아침 6시 이후에 일어나본 일이 없다.
Q. 교관으로서의 자질 향상을 위해 노력한 것이 있다면.
A. 나에 대하여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좀 머쓱하지만, 군 생활을 하며 한국체육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군사영어반 과정도 수료했다. 교육 준비와 성과 분석에도 항상 노력을 기울인다.
Q. 기억나는 교육생이 있나.
A. 3사관학교의 생도 교육을 할 때 세 번째 강하를 하며 부상을 입은 교육생이 있었다. 엑스레이를 찍어 본 것은 아니지만 현장의 누가 보아도 다리가 부러진 것이 분명한 상황이었다. 훈련을 중단시키고 병원으로 보내려고 하였는데 네 번째 강하도 반드시 나와 함께 하고 싶다며 끝까지 의지를 굽히지 않아, 결국 네 번째 강하를 하는 그 교육생을 다른 교관과 함께 아래에서 안아 받았다. 수료식에서 ‘교관님,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하였던 그 교육생은 나 역시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교관으로서의 의지를 다시한번 불사르게 한 일이었다. 자살증후군의 우려가 있는 병사를 맡은 적도 있는데, 처음에는 얼굴이 어두웠던 병사가 여러 차례의 면담를 거치며 교육 과정을 이겨내고 밝은 얼굴로 수료하며 나간 일도 기억에 남는다.
Q. 여군 교육생들을 어떻게 대하나.
A. 여군 교육생들이 처음에 힘들어 하는 경우가 많다. 힘들어 하는 후배들에게 정신력으로 버티라는 말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프다.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차별을 원하느냐. 그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포기하지 마라’고 항상 말한다. 오히려 여군들을 더 강하게 다그친다. 남군들에게 지지 말고 설령 체력이 다소 안 되더라도 정신력과 목소리로 이겨 나가라고 말한다.
Q. 가족들에 대한 마음은 어떠한가.
A. 자기관리가 소홀하면 자기 자신에게 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자리에서건 거기에서의 임무에 소홀하지 않고 나의 역할을 다해낼 것이다. 군인으로서, 아내로서, 엄마로서, 며느리로서 그 어느 역할에도 나의 소임을 다하려 한다. 가장 큰 지원군이자 내 힘의 근원은 가족이고, 가정이 태평하면 모든 일이 잘 된다고 본다. 근무로 인해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늘 미안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함께 살고 있는 시어머니께서 ‘우리 며느리, 미안해하지 말고 열심히 일해라’고 격려해 주신다. 정말 좋으신 분이다.
Q. 군인으로서의 꿈은.
A, 공부에 욕심이 많다. 더 공부해서 대학교의 부사관학과 교수가 되고 싶다.
Q. 마지막으로 가족에게, 교육생들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해 달라.
A. 가족에게는 항상 고맙고 감사하다. 지금처럼 믿고 의지하며 서로의 힘이 되어 주고, 나도 노력할 테니 앞으로도 가정이 태평성대를 누렸으면 좋겠다(웃음). 이 시간이 정말 너무나도 행복하고, 100%가 행복도의 끝이라면 지금 100% 행복하다. 교육생들에 대해서는 항상 서로 믿어주고 의지가 되며, 자신이 아닌 전우를 위해 다독여주는 나의 교육생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강하 훈련을 마친 뒤 자부심을 가지고 베레모를 썼으면 한다. 나 자신에 대해서는 늘 공부하라고 말한다. 책을 많이 읽고 식견을 넓혀야 타인에게 할 수 있는 말의 폭도 넓어지기 때문이다. ‘공부해서 남 주나’라는 말이 있는데, 나는 열심히 공부하고 마음의 부자가 되어 남에게 주고 싶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교수가 되어 이것을 실천하는 것이 꿈이다.
☞ 글/사진 : 김준석 블로그 기자
http://keywui.chosun.com/contents/103/228/view.keywui?mvSeqnum=74494
그녀들의 환한 웃음에 아르빌이 마음을 열었다
8일 오후 이라크 아르빌 북쪽 바히르카 마을. 자이툰부대 12민사여단 122대대 김세령(金世伶·여·24) 중사에게 마을 어린이 10여명이 몰려들며 이름을 외쳤다. 자이툰부대가 아르빌에 배치된 뒤 마을을 네 번째 방문한 김 중사는 이 지역 주민들 사이에 벌써 소문이 퍼져 ‘스타’로 뜨고 있다.
김 중사의 주임무는 주민들을 상대로 한 각종 지원 등 민사(民事)작전. 김 중사는 쿠르드어로 인사말을 하며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사탕 등 선물을 주기도 했다. 그는 특히 쿠르드 여성들이 낯선 남성들의 방문을 꺼리는 점을 감안, 부대원들이 새마을운동 지원을 위한 가정 방문을 할 때 쿠르드 주민들의 거부감을 완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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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주일여 동안 김 중사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은 참담했던 일부 쿠르드 어린이들의 모습이다. “새마을운동 시범 마을을 방문했을 때 어린아이가 개·닭과 배설물로 뒤엉킨 창고 같은 방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벽만 남아 있어 집이라고 보기 어려운, 저런 곳에 과연 사람이 살 수 있을까 하는 곳들도 있었는데 그런 곳에서 사람들이 튀어나와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172㎝의 훤칠한 키에 특공무술 2단 등 총 5단의 무술 유단자인 김 중사는 앞으로 만들어질 아르빌 태권도 도장에서 사범으로도 활약할 예정이다.
김 중사는 남성들도 견디기 힘들어 하는 특전사 최정예 요원인 공수교육처 교관 출신. 어릴 때 TV에 등장한 특전사 요원들의 모습에 반해 99년 특전사에 입대했다. 지난 4월 서희·제마부대로 이라크에 파병된 뒤 이달 말 복귀할 예정이었지만 “자이툰부대 평화 재건 활동에 여군도 할 일이 많을 것”이라며 6개월 연장 신청을 냈다. 이라크 남부 나시리야에 주둔했던 서희·제마부대 근무 시절 동맹국 군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무술 시범을 보여 ‘미스 나시리야’로 불렸다. 국내에선 한국을 방문한 각국 VIP들을 상대로 헬기 레펠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122대대엔 김 중사 외에 이정신(李定信·여·24) 중사도 ‘홍이점(紅二點)’으로 활약 중이다.
크지 않은 키에 호리호리한 체격이지만 태권도 4단, 특공무술 3단 등 총 7단의 무술 유단자다. 460차례의 고공 강하 경력을 가진 베테랑으로 ‘특전사 중 특전사’로 불리는 707특수임무대 고공강하 시범요원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국군의 날 행사에서 특전사 고공강하 시범을 보고 특전사 요원이 돼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이 중사는 “아르빌 지역에선 여성의 활동이 매우 제약돼 있는 사회현실 때문인지 대민활동을 나가면 상당히 신기해 한다”며 “이런 점 때문에 현지 주민들이 오히려 더 우호적으로 대해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중사도 김 중사와 함께 태권도 도장이 설치되면 사범으로 일할 예정이다.
자이툰부대에는 이들을 포함해 간호장교 10명, 검문검색 담당관 14명 등 총 31명의 여군 장교(17명) 및 부사관(14명)이 선발돼 지금까지 25명이 아르빌에 도착했으며, 통역분야 등에서 여군무원 3명도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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