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충남 연기군에 사는 일흔다섯 살의 할아버지는 1999년 부인과 딸 명의로 된 임대 아파트에 들어갔다.
할아버지는 대소변조차 가리지 못하는 부인을 간호하느라 자리를 뜰 수 없었고,
딸 역시 먼 거리에서 서류를 떼러 다니기가 불편해 자기 이름으로 임대 계약하고
아버지가 살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임대 아파트의 계약자와 실 거주자가 다른 것은 위법이므로 주택공사는 퇴거 명령을 내렸다.
결국 사건은 소송에 들어갔고 원심에서 주택공사가 승소했다.
하지만 항소심에서 대전고법 박철 판사는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75세 노인이 계약 체결 과정에서 있었던 작은 실수 때문에 살아온 주거 공간에서
계속 살지 못한다는 것은 균형을 잃은 것으로, 법 절차를 몰라 딸 명의로
임대주택을 얻어 살아온 노인에게 우선 분양권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판결문에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칠십 노인을 집에서 쫒아내 달라고 요구하는 원고 소장에서는 찬바람이 일고,
엄동설한에 길가에 나앉을 노인을 상상하는 이들 눈가에는 물기가 맺힌다.
우리 모두 차가운 머리만을 가진 사회보다 따뜻한 가슴을 함께 가진 사회에서
살기 원하기 때문에 법 해석과 함께 집행도 차가운 머리만이 아닌
따뜻한 가슴도 함께 갖고 해야 한다고 믿는다."
2.
뉴욕 시장을 세 번이나 연임했던 피오렐로 라과디아는
시장으로 재직하기 직전 그곳의 법원 판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1930년 어느 날.
상점에서 빵 한 덩어리를 훔치고 절도혐의로 기소된 노인을 재판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에도 빵을 훔친 적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처음 훔쳤습니다."
"왜 훔쳤습니까?"
"예, 저는 선량한 시민으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일자리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사흘을 굶었습니다.
배는 고픈데 수중에 돈은 다 떨어지고 눈에는 보이는 게 없었습니다.
배고픔을 참지 못해 저도 모르게 빵 한 덩어리를 훔쳤습니다."
라과디아 판사는 노인의 딱한 사정을 듣고 곧 판결을 내렸습니다.
"아무리 사정이 딱하다 할지라도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은 잘못입니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고 예외가 없습니다.
그래서 법대로 당신을 판결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에게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방청석에서는 판사가 노인의 딱한 사정을 감안해 관대하게 선처할 줄 알았는데...
뜻밖의 단호한 판결에 여기저기서 술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라과디아 판사는 논고를 계속했습니다.
"이 노인이 빵 한 덩어리를 훔친 것은 오로지 이 노인의 책임만은 아닙니다.
이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이 노인이 살기 위해 빵을 훔쳐야만 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임에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고 방치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도 10달러의 벌금형을 동시에,
이 법정에 앉아 있는 여러 시민 모두에게 각각 50센트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 지갑에서 10달러를 꺼내어 모자에 담았습니다.
"경무관, 당장 모두에게 벌금을 거두시오."
판사는 모자를 모든 방청객들에게 돌리게 했습니다.
아무도 판사의 선고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거두어진 돈은 57달러 50센트였습니다.
라과디아 판사는 그 돈을 노인에게 주도록 했습니다.
노인은 돈을 받아서 10달러를 벌금으로 내었고,
남은 47달러 50센트를 손에 쥐고 감격의 눈물을 글썽거리며 법정을 떠났습니다.
3.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렴."
지난달 초 서울 서초동 법원청사 소년법정. 서울 도심에서 친구들과 함께 오토바이 등을 훔쳐
달아난 혐의로 피고인석에 앉은 A양(16)에게 서울가정법원 김귀옥(47) 부장판사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거운 보호 처분을 예상하고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있던 A양이 쭈뼛쭈뼛 일어나자 김 부장판사가
다시 말했다. "자, 날 따라서 힘차게 외쳐 봐. 나는 세상에서 가장 멋지게 생겼다."
예상치 못한 재판장의 요구에 잠시 머뭇거리던 A양이 나직하게 "나는 세상에서…"라며 입을 뗐다.
김 부장판사는 "내 말을 크게 따라 하라"고 했다.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나는 이 세상에 두려울 게 없다.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
큰 목소리로 따라 하던 A양은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고 외칠 때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법정에 있던 A양 어머니도 함께 울었고, 재판 진행을 돕던 참여관·실무관·법정 경위의 눈시울도 빨개졌다.
A양은 작년 가을부터 14건의 절도·폭행을 저질러 이미 한 차례 소년 법정에 섰던 전력이 있었다.
법대로 한다면 '소년보호시설 감호위탁' 같은 무거운 보호 처분을 받을 수 있는 상황.
그러나 김 부장판사는 이날 A양에게 아무 처분도 내리지 않는 불(不)처분 결정을 내렸다.
그가 내린 처분은 '법정에서 일어나 외치기'뿐이었다.
그가 이런 결정을 내린 건 A양이 범행에 빠져든 사정을 감안했기 때문이다.
작년 초까지만 해도 반에서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던 A양은 간호사를 꿈꾸던 발랄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작년 초 남학생 여러명에게 끌려가 집단폭행을 당하면서 삶이 바뀌었다.
A양은 당시 후유증으로 병원 치료를 받았고,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신체 일부가 마비되기까지 했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A양은 학교에서 겉돌았고, 비행 청소년과 어울리면서 범행을 저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김 부장판사는 법정에서 말했다.
"이 아이는 가해자로 재판에 왔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삶이 망가진 것을 알면 누가 가해자라고 쉽사리 말하겠어요?
아이의 잘못이 있다면 자존감을 잃어버린 겁니다. 그러니 스스로 자존감을 찾게 하는 처분을 내려야지요."
눈시울이 붉어진 김 부장판사는 눈물범벅이 된 A양을 법대(法臺) 앞으로 불러 세웠다.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중요할까. 그건 바로 너야. 그 사실만 잊지 않으면 돼.
그러면 지금처럼 힘든 일도 이겨낼 수 있을 거야."
그러고는 두 손을 쭉 뻗어 A양의 손을 꽉 잡았다. "마음 같아선 꼭 안아주고 싶은데,
우리 사이를 법대가 가로막고 있어 이 정도밖에 못 해주겠구나."
이 재판은 비공개로 열렸지만 서울가정법원 내에서 화제가 되면서 뒤늦게 알려졌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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